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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

2023.3.26 은유에게

by 여다들 2023. 3. 26.

2023.3.26

 

은유에게

 

은유야 안녕. 너에게 편지를 마지막으로 쓴게 고등학생 때 같은데 비겁한 나는 이렇게 내가 필요할 때만 너를 꺼내들어 앉혀놓고 편지를 쓴다 아니 쏟아낸다

 

바야흐로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야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

바람은 아직 찬데 햇살은 따뜻한 날씨지

맨손을 가만히 뒤집어보면 피부에 샅샅히 와닿는 햇빛의 촉감이 느껴지고, 그 위를 쓰다듬는 바람도 느껴져 

춥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묘한 경계에 있는 날씨가 내겐 더없이 완벽해

죽기도 살기도 싫은 묘한 경계에 껴 있는 나같아서일까 동질감을 느껴

 

평상시에는 좀 걷는데, 오늘은 뒷산을 다녀왔어

일요일 오후 3시에 오르기 시작했어.

오후 3시. 예전에 읽었던 글 중에 오후 3시 같은 사람이 되지말잔 표현을 읽었던것 같아

뭘 시작하기엔 늦고, 그렇다고 아예 놔버리자니 아직도 하루가 너무 많이 남은 어중간한 시간이란 뜻이겠지

글쓴이는 아마 어중간한 사람이 되지 말자는 뜻으로 썼을꺼야

난 내가 항상 오후 3시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뭘 일구기에는 야망이 부족하고, 그저 편히살기에는 추상적인 욕심이 다글다글하지

여튼 나는 애매한 시간에 뒷산을 올랐다

 

온통 갈색이랑 회색인 산 곳곳에 진달래가 폈더라

길에서 보는 것 처럼 이쁘고 화사하지않고 바람을 맞아서 쭈글쭈글했어

꽃잎들끼리 붙어있는게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펼쳐본 낙하산 모양같기도 했고

산진달래를 보고 생각한건데, 나는 4월에 온 천지가 꽃이 만개한 것보다

이렇게 무채색 사이로 간간히 분홍색, 노란색이 보이는 순간이 더 좋아 눈을 크게 치켜뜨고 살피지 않으면 꽃이 핀지도 모르겠는 이 순간말이야

 

꽃이 만개한 4월은 너무 서글퍼. 나만 그런가?

가지가 무겁게 흐드러진 벚꽃들을 보면, 이제 지는일만 남았군, 이란 생각이 들면서 너무너무 슬퍼지던데

마치 죽음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기 직전같기도 하고

몇 년 전 봄인가, 벚꽃이 한창인 개천가 벤치에 어떤 노인이 벚꽃잎을 맞으며 앉아있는 모습을 봤어

그 사람의 화양연화는 이미 끝났겠지... 살면서 앞으로 이전에 겪었던 만큼 행복한 순간이 오지 않는단건 어떤 느낌일까 혼자 생각해보고 너무 무서워서 오싹했어

지금 생각해보니 누군가의 인생을 맘대로 재단하고 단정해서 생각한 나의 오만 같기도 한데

그 노인은 다시는 오지 않을 행복에 슬펐을까? 아니면 그 날 온힘을 다해 피워낸 꽃들을 보며 아름다운 풍경에 행복했을까?

내 천성은 전자인데 난 후자같은 사람이 되고자 간간히 발버둥치며 노력해

 

원래 산 속에 있는 절까지 가려했는데 너무 멀어서 가진 못하고

중간쯤 있는 벤치에 앉아 반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했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까

우선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려봤어

첫 번째는, 누군가의 눈 속을 들여다봤을 때, 이 대로 평생 살아도 그럭저럭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두 번째는, 가족들과 모닥불을 피워놓고 불멍을했을 때, 저녁식탁 앞에서 그들의 첫만남과 연애시절 사소한 오해를 들었을 때

종합해보자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우리 가족 (특히나 부모님)이 안락하게 그들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돕고, 즐거운 순간들을 의식적으로 만드는 것.

 

그러다가 내가 아직 걷지 않은 길에서의 행복도 있을까 생각했어

있다면 아마 자아의 신화를 이루는 행복일까? 연금술사에서 산티아고가 그럭저럭 괜찮은 양치기로 살 때 잠을 자려고 누워도, 잠에서 깨서도 잊혀지지 않던 보물상자 처럼 말이야

나에게 그런게 있을까?

있었던거 같기도 하고... 지금은 기억이 안나. 당분간 들여다볼일이다

 

머릿속에 생각을 제법 데굴데굴 굴리다가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지

다시 보니 산길이 험하더라

개천을 걸을때는 정말 생각 정리만 했던거 같은데

산은 시시각각 변하는 나무들, 하늘, 고도, 가지각색의 낙엽들이 내 눈에 쏟아져서 정신을 마구 뺏기고 말았어

산을 보다가, 날씨를 즐기다가, 어제 만난 모임에서 트레바리가 아닌 듀오바리라는 농담이 생각나서 혼자 흐흐흐... 소리내며 웃다가,

다 삭아 부서진 나무울타리를 보며 이게 조선시대때도 있었을까 하며 그 시절 이 길을 걷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100년 200년 전 사람들은 다 죽고 없어졌지를 깨닫고 모두에게 평등하게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가

죽음이 있어서 다행이다, 싶다가도 괜시리 눈물이 나서 한 번 찔끔했지

 

은유야, 나는 좋은데 슬프고 기쁜데 서글퍼

인생을 행복이 아닌 경험이라던데

이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는 것도 내가 결국은 받아들일 일이겠지

 

언젠가는 이 모든게 편안해지는 날이 올까

온다면 그건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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